独り言
오래 전 '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만남은 새로운 세계로 초대를 해주었고,
실참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아루나찰라 산의 모습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어도,
신의 모습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여러권 읽었는데도
마하리쉬가 후두암으로 고생하고 돌아가셨다는 얘기나
침묵으로 온전한 가르침을 전했다는 말이나
신체의 각 부분, 각 부분을 "OO은 나가 아니다..."거듭 집중해서 의식을 모으는 수행법을 했다는 사실은
람 다스의 <성찰>을 통해서 알아졌다.
서양의 심리학자, 불교학자, 종교인의 자격으로 책을 저술한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니
눈에 익은 사람들의 글들이 중복되어 책에서 읽혀지곤 한다.
과학적인 논문처럼 힐링을 다루는 서양인의 학습법이
한 울타리 속을 맴도는 느낌을 갖게하지만,
경전을 들고 반복 학습하는 법문시간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무의식에 대한 글들을 읽다보니 융의 책까지 잡게되었다.
집단 무의식을 거론하지 않아도
인연의 씨실 날실 짜여진 천 위에서 날아봐도, 뛰어봐도,,,
결국은..부처님 손바닥 안!
원형..다른 말로 업, 카르마로 달리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종이로 우연히 전해진 글 한줄조차 시절인연에 따라 만나진다는 사실.
오묘한 가르침은 특별히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앞에 놓여져 있다.
한번의 들이쉼, 내쉼의 호흡 한번.
한걸음, 한걸음 온전히 내딛는 발걸음 한 발자국.
찰라에 억겁을 넘나드는 망상자락을 내려놓는 일.
최고 어려운 일이지싶다.
무의식을 바꾸는 일, 운명을 바꾸는 일...바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
좌복 위의 한 시간이 무의식을 바꾸고,
참회의 절 한번이 업식을 맑히고,
사티로 끄달림이 없다면...하루 잘~살았다.
페르소나..
연작 시리즈로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의 이름을 먼저 결정지었다.
백지 위에 이미 그려진 그림들 마냥
작품이 되어 이름을 먼저 갖게 되었다.
나와의 만남이 이렇게 또 다른 매개체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설레임은 타인과의 소통으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마주보기로도 가능한 일.
혼자 거울보기로 한참을 신명나게 생겼다.
포행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
깨달음을 소원하는 치열한 구도자 또한 지극한 탐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해탈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 욕망 또한 탐심이 아닐까?
사랑스런 탐심이라 했던가?ㅎㅎㅎ
항상 네모, 세모로만 규격을 정하고 융통성 없는 좁은 시야의 개구리가
우물을 조금 벗어나나보다.
있는 그대로의 것에 빠져보기..게쉬탈트의 연장.

I Hide Myself Away In The Dark
*Zewar Fadhil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