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당 양익 대선사

訃 告 보도내용

Kalavinka 2012. 7. 4. 15:56

선무도 권위자 양익스님 별세


▲ 양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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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전통무예인 ''선무도'' 대중화에 헌신했던 범어사 청련암 양익 스님이 5월 6일 새벽1시20분 청련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3세, 법랍 45세.
1962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로 출가한 스님은 1971년 이후 범어사에서 불교수련법의 하나인 선무도를 연구, 보급해 왔다.
조계종은, “스님이 좌탈(坐脫·앉은 자세로 별세함) 입적했다”고 밝혔다.
선무도로 통칭되는 ‘불교금강영관’의 권위자로 평생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매진해, 골굴사 주지 적운 스님, 호압사 주지 원욱 스님, 금강선원 안도 스님 등 선무도를 대표하는 스님들을 길러냈다.

스님은 불교무도에서 한국 최고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원조 격이었다. 젊은 시절 범어사 일주문을 쉽게 뛰어넘었다고 하며,쌍계사 조실 고산 스님은 양익 스님이 결가부좌한 채로 공중부양하여 천장의 못을 빼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스님이 집대성한 불교무도는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 고려시대까지 전수되다가 중국 선종이 들어오면서 맥이 끊긴 즉신성불(卽身成佛,현재의 몸이 그대로 부처가 됨)의 밀교수행법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스님은 출가 전에 이미 고수였는데 서울 청도관의 허사범(스님의 속명은 허남익)이라면 명동의 깡패들도 겁을 냈다고 한다.

출가 직후 동화사 불국사 봉훈사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뒤 71년 범어사에 돌아가 40년 가까이 줄곧 후학을 지도했는데 선무도를 펴고 있는 골굴사 주지 적운 스님을 비롯해 수백 명에 이르는 출가 재가의 고수 제자들이 있다.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설파했던 스님은 무엇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다. 또한 "자기의 복을 비는 기도라고 해도 헛되지 않다.

 

마음을 모으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기도는 멀리 있는 인연을 앞당길 수 있다"며 불교 연기법을 불자들이 생활 속에서 알기 쉽게 얘기했다.

제자 안도 스님은 "입적 하루 전날인 부처님오신날에도 스님께서는 통도사 적멸보궁을 참배하셨다. 당신께서는 제자들 모르게 입적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범어사 주지 대성 스님은 "스님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는데 아무런 법문도 남기시지 않고 고요히 앉은 채 원적(圓寂)에 드셨다"고 했다.

 

중국 허난성 숭산(嵩山)에 자리잡은 샤오린쓰(소림사)는 1천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제일의 선종(禪宗) 사찰이다. 산문(山門) 위에 걸린 검은 색 바탕에 금색 글씨의 '少林寺' 편액은 1704년 청나라 강희 황제가 직접 내린 것이다. 사찰 내 자운당에는 124개의 돌비석이 있는데 당·송·원·명나라 시대의 필법을 담고 있다. 역대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림(塔林)도 눈길을 모은다.

일반 관광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영화로 많이 알려진 소림무술. 사찰 입구의 연무청(演武廳)이라는 강당에서 10~20대 무술승들이 나와 시범을 보여준다. 강건하면서도 소박하고,다양한 동작을 정밀하게 함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한다. 소림 무술은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도한 뒤 기력을 되살리기 위해 취했던 동작이 그 시원(始源)이다. 수나라 말기 곤봉무술을 잘하던 소림사 스님 13명이 훗날 당나라 황제가 된 이세민을 구출한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무술승이 한때 500여명에 달했다. 지난 3월엔 유도 고수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소림사에서 무술시범을 관람해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호국불교의 전통이 뿌리깊은 우리나라에서도 불교 무술이 이어져 왔다. 신라 화랑들을 지도했던 원광법사의 '세속 5계'는 생명을 중시하면서도 나라를 지켜야 했던 당시 수행자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려 숙종 때 여진족의 잦은 침범에 윤관은 승려로만 구성된 특수부대인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승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무찔렀다. 불교 무술은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며,움직임(動)과 고요함(靜) 가운데 마음을 다스려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맥이 끊겼던 불교 무술을 복원하고 집대성했던 대가가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 스님이다. 스님은 지난 6일 앉은 채 입적(坐脫立亡)하셨으니 가시는 길에도 큰 가르침을 남긴 셈이다.

스님의 열반을 계기로 무술 수행법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직계 제자 안도 스님에게서 불교금강영관과 양익 스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1971년 양익 스님이 높이 4m에 이르는 범어사 일주문을 뛰어넘었다는 얘기는 사실입니까?" 안도 스님은 "경공술(輕功術)이라는 게 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몸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음 먹은 대로 몸이 따라가는 경지가 있다"라며 "스승은 몸이 마음을 따라올 수 있는 수행의 경지,심신일여(心身一如)를 입버릇처럼 늘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

같은 새끼줄이라도 도둑에게는 목 조르는 흉악한 줄이 될 수 있지만 선한 이에게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몸도,마음도 그 새끼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8~9년 전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길이 60㎝의 봉(棒)이 스님의 어깨와 팔의 윤곽을 따라 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라고 했다. 호흡으로 기를 모을 때 물체를 부릴 수 있다는 것. 이른바 내공이다. 검도 고수가 내려치는 목검을 썩은 나뭇가지로 맞받았는데 오히려 목검이 부러졌다는 양익 스님의 전설도 다 같은 얘기다.

 

안도 스님은 "관법(觀法)이 중요하다.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이다"고 했다. 관법에는 앉아서 몸의 호흡을 골고루 돌리는 좌관(坐觀),다리와 허리로 서서 몸의 균형을 이루며 호흡 위주로 마음의 움직임을 관하는 입관(入觀),극대로 움직이면서 삼매에 드는 행관(行觀)이 있다. 입관과 행관에서는 호랑이 용 사슴 원숭이 곰 거북 학 등 7가지 동물의 움직이는 모습도 빌려오는데 "그것은 자연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세를 빌려와 몸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안도 스님은 설명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자세는 모든 운동의 기본 자세인 기마 자세이다. 허리와 관절을 강화시킨다. 기마 자세로 서서 명호나 진언을 1천독,혹은 1만독하는 것도 하나의 수행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안도 스님은 "스님은 신구의(身口意),몸동작과 호흡,마음 3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것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이 관법의 요체"라고 했다. "호흡으로는 억지로 하는 단전호흡보다 아주 자연스러운,마음이 맑아지면 저절로 이르는 태식호흡을 해야합니다."

그는 "무술이 출중해 공중부양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스승은 관법을 통해 영육을 넘나들었다는 것을 차츰 알게됐습니다. '구병시식'이라 하여 청련암에서 스님이 행했던 숱한 천도는 스님의 경계를 드러내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양익 스님의 맥을 이어받은 직계 제자들의 다수는,스님의 가풍을 따라 밖에 나서서 가르치는 걸 삼가하고 지금 토굴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안도 스님은 "열반 전날,스님은 서류들을 사제 약연에게 맡겼다. 또 통도사에 들러 부처님 사리를 친견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전혀 몰랐다"고 했다.

 

양익스님은,불국사 문중으로 월산 스님의 상좌들인 경주의 허주 스님,진주의 종인 스님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무술승으로 꼽혔다. 양익 스님의 직계 상좌는 28명이며,양익 스님이 가르친 불교금강영관 연수원 출신들 모임(18명)이 있는데 모두 불교 무술의 고수들이다.

장례는 범어사 다비장으로 치러진다. 분향소 범어사 보제루,영결식 2006년 5월10일 오전 10시30분

 

* 여러 기사내용을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