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릉빈가

그림자

Kalavinka 2015. 8. 6. 14:17

 
 

 

 
그림자. 삶의 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다. 어린아이는 뜨는 해를 등지고 걷는다.
몸집이 작은데도 큼직한 그림자가 앞서가고 있다.
그것이 그의 미래인데, 입을 딱 벌리고 있지만 또한 납작하게 눌려진, 약속과 위협으로 가득 찬 동굴이다.
아이는 흔히들 그의 <열망>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에 이끌려 그 동굴을 향해 나아간다.
 
정오가 되면 해는 남중하고 그림자는 어른의 발밑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게 된다.
완성된 인간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들에 정신이 팔린다.
그는 미래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다.
미래때문에 불안해 하지도 않는다.
아직은 그의 과거가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가올 날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흘러간 세월에 대해 향수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현재를, 동시대인을, 친구를, 형제를 믿는다.
 
그러나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성숙한 인간에게는 등뒤에 그림자가 생겨나서 점점 길어진다.
이제부터는 그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추억들의 무게를 발뒤축에 끌고 다닌다.
그가 사랑했다가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에 보태지는 것이다.
 
과연, 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과거의 덩치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자신은 점점 작아진다.
뒤에 달린 그림자가 너무 무거워져서 걸음을 멈추어야 되는 날이 온다.
그러면 그는 사라져버린다.
그는 송두리째 그림자로 변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맡겨진다.

p226
 
 
-그림자 전문-
 
 
짧은 글 긴 침묵; petites proses/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