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용큰스님을 그리며..
울주군 인성암 선용(善用) 스님
“지극한 정성은 모든 장애를 녹입니다.”
“내래 산 속에서 벙어리로 살아가는지 오래디요.
무슨 할 말이 있갔시요.
그저 나 같은 늙은 중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디요.”
구수한 이북 사투리 속에 진하게 배어 있는 스님의 개인사야말로 이 민족의 수난사와 겹쳐지는 것이요,
이즈음 일고 있는 남북한 화해 분위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진화에 수행자의 덕화가 한몫 했으리라는 생각을 못내 떨칠 수 없어
스님을 더욱 뵙고 싶었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들면서…
스님은 “왜 고향이 그립지 않겠소?”라는 한마디로 지난 세월을 일축하셨다.
“전생의 습이었던지 방학만 되면 일본으로 만주로 여행다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군요.
여행방침은 항상 가는 차비만 들고 가는 것이었는데, 다급하면 용단이 생기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평남에서 태어나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신의주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중국어에도 능통해서 여비없이 여행 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정처없이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면 일자리를 찾아 여비를 벌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렇듯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일과의 새로운 만남은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에 들어갔다가 해방 후 서울에 돌아와 복학준비를 하고 있는데
삼팔선이 가로막혀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막막한 것도 잠시, 고학을 하면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여행을 통해 얻은 산경험 덕분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교신자가 된 것은 전쟁터에서였지요.”
동족간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말 그대로 민족적 비극이었던 6·25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던 스님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어들어야 하는 전쟁터에서 인생무상을 절감했다.
불바다 속에서 눈뜨고 숨쉬니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뿐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하는 궁극적인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특히 총을 질질 끌고다닐 정도로 어린 소년병들이 비상시 바짝 바닥에 엎드려야 할 때 총성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 죽어갈 때
그 비통한 슬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한창 공부할 나이의 저 어린 소년들이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가?’
절규하다보면 입에선 관세음보살이 흘러나오고,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그네들을 위한 왕생극락의 염원이 뼛속같이 사무쳤다.
가장 비극적인 현장에서 가장 큰 고난을 통해 마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휴전이 되어 제대하고, 요양차 부산 송도에서 머무르다 범어사에 가게 되었는데 마치 고향에 온 듯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 거북 만 자라라 일컫는 범어사의 바위 숲에 들어가 있는데 극락이 따로 없는 듯했다.
지나다니시는 스님들의 모습은 마치 신선 같았다.
팔베개를 베고 누워 하늘을 보니 ‘이곳이야말로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종무소를 거쳐서 동산 스님을 뵙고 출가하고 싶다는 마음의 결심을 밝히자,
‘마을로 내려갔다가 깊이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올라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부산시내 밤거리가 왜 그리 어두워보였는지 모른다.
살 길이 마을에 있지 않고 절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 이튿날 아침 동산 스님을 찾아 뵙고 입산출가하였다.
불보살의 자비광명 속에서 평온을 얻었으니…
“45년 전 일주문에 처음 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부처님 정말 고맙습니다’ 하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민족 수난사의 정점이었던 일제시대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성장해오면서 어느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던,
방황하던 젊은 청춘은 일주문에 들고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너무 좋아서 그저 부처님전에 이바지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지요.”
처음부터 남이 하기 싫어하는 소임을 자원했다.
공양주 소임을 살 때 생전 처음 가마솥 밥을 지었는데도 밥이 잘 지어졌다.
“아마도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얼굴이 밝고 좋았을 때가 공양주할 때였을 겁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 속에서 법열을 느끼고 만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시작한 스님으로서는
수많은 대중을 살리는 공양주 소임이야말로 공덕행이기 이전에 가장 뿌듯한 불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필체가 좋다 하여 종무소에서 호출을 했고, 행자 때부터 스님들 분한신고를 하는 등 종무업무에 동분서주하기 시작,
꼬박 20여 년 동안 범어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아 그 큰 절 살림을 한 것도 오로지 부처님 은혜를 갚기 위한 일환이리라.
“이판이 뭔지도 모르고 사판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는 대로 했지요.”
공심으로 일하고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수행하는 스님의 용맹정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사미계를 받은 직후 특별히 지효 스님, 도견 스님, 일타 스님, 광덕 스님 등 큰스님들이 정진하고 계셨던 범어사 특별선원에서
함께 정진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도 다 스님을 특별히 아꼈던 어른스님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범어사 보제루 축대가 매우 높은데, 해마다 쌓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했지요.
하루는 축대를 쌓는 공사현장에서 ‘스님, 저렇게 쌓아서 되겠어?’ 하시는 지효 스님의 말씀에,
‘저건 일이 아니고 일 시키는 사람이 봐주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가 공사 감독을 맡게 되었고,
그 공사가 끝나고나서도 또다른 공사가 시작될 때마다 감독을 맡게 되었지요.”
스님은 광덕 스님께서 범어사 주지로 계실 때도 총무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광덕 스님은 뒤에서 밀고 스님은 앞에서 리어카를 끌면서
주차장 축대를 쌓고 매표소 올라가는 계단을 만드는 등 도량을 가꾸던 일들이 지금껏 기억에 새롭다.
“광덕 스님은 참으로 훌륭한 인욕보살이셨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일도 온화한 미소로 받아주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감화를 받았지요.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속이 문드러질 정도로 썩어서 편찮으신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광덕 스님을 모시고 살 때 큰 공부를 했다시며, 세상사람 다 못 믿어도 광덕 스님 말씀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것이라며
그 옛날을 회상하는 스님의 얼굴빛이 환하다.
스님의 적막을 깬 불청객에게 말문을 여신 것도 다 광덕 스님과의 소중한 인연 덕분이리라.
성장을 도와주는 도반들과 어른스님들
은사이신 동산 큰스님께서 선용(善用)이라 법명을 지어주신 것도 다 도인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공양간에서 종무소에서 공사현장에서 실로 스님만큼 이모저모 알뜰하게 잘 쓰여진 분도 드물 것이다.
심지어 강원에서는 고학할 때의 경험을 살려 교재를 철필로 직접 긁고 등사판에 일일이 프린트를 해서 학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 대신 특별선원에서 정진하고, 강원에서는 청강을 하는 특별대우를 받기도 했다.
“선방에서 정진하면서 공사를 감독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군요.”
비오는 날은 감독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정진할 수 있었기에 비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는 그 시절, 처음에는 정진 따로 일 따로였다.
공사현장에서는 일손을 돕느라 화두를 놓치곤 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두가 여일하게 잡혔다.
더 이상 일과 수행이 둘이 아닌 경계를 접하고 법열로 충만해졌다.
“선가귀감에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시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니라.’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큰스님들과 함께 정진한다는 것만으로도 신심이 나고 공부가 절로 잘 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일견 불만스럽기도 했다.
절 집안 교육체계에 대해 적응하기 힘든 면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의문나는 것을 물어볼 때마다 “몸소 터득해야지 그런 건 가르쳐 주는 게 아니야.”라고 하시는
선방 스님들의 한결같은 대답을 듣고 답답해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수행이 깊어갈수록 선방에서 말 뻥긋 잘못 했다가는 목침이 날아가던 풍경을 이해하게 되었고,
스님 스스로도 공부하는 분상에 대해 할 말이 점점 더 없어졌다.
“말로 공부하면 말 잘하는 사람이 다 해야지요. 교육상으로는 그게 필요하겠지만,
실로 수행은 스스로 터득할 뿐 말로 떠들 만한 것은 못 됩니다. 물을 마셔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물맛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각자 마셔보고 느껴야 하듯, 수행을 하면 우리 모두 본래 간직하고 있는 부처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스님은 젊었을 때는 호기로서 갖가지 경계를 터득한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왈가왈부하다보면 삿되지고
도리어 공부에 흠집을 내는 것이라며 대중이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승가공동체에 대해 강조하셨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눈부신 성장을 도와주는 도반들입니다.
부처님께서 ‘우정을 가지고 좋은 벗들과 함께 잘 지낸다는 것은 성스러운 수행의 반이 아니라 그 전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른스님들과 도반들과 같이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어른스님을 모신 회상에서 도반들과 함께 조석예불, 대중공양, 울력, 수행정진을 하는 산사의 하루,
정신적·육체적으로 깨어있는 수행자의 일상생활 속에서 저절로 성숙해지고 여법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병고 속에 나툰 깨달음의 빛,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오리
몸에 병 드는지도 모르고 범어사 만년 총무 소임을 살았다.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 직접 장을 보고 수많은 대중들의 부식거리를 짊어지고 범어사까지 오르내리면서 육체를 무리하게 혹사시켰다.
관청에 볼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오후가 되어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공양을 거르는 것은 다반사였다.
뒤늦게 끼니를 떼우고 부지런히 걸어도 범어사에 도착하지 못해 한데서 날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20년 세월 육체를 돌보지 않은 사이에 병이 점점 깊어져 의사가 포기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곧은 마음이 곧 불도량(佛道場)이라고 하시면서 이 몸에 대하여 탐착하지 않으면 어디를 가나 반드시 걸림이 없으리라”고
하셨는데, 불현듯 병고라는 장애를 만난 수행자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옛어른들이 ‘금생에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시키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막상 죽음에 임박하고 보니 참으로 다급해지더군요.”
이미 출가 전 전쟁터에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이치를 체득했고, 그 인연으로 불제자가 되었지만,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중생을 건지려는 원력의 반도 실행하지 못했다’는 회한이 밀려왔던 것이다.
“참선할 기력도 없고, 남은 시간 기도하면서 회향하자는 생각으로 범어사 산내암자(미륵암)에 올라가 사분정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면서 진심으로 번뇌망상의 불집에서 완전히 뛰어나오는 마음의 출가를 새롭게 한 수행자의 정진력은
수백 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일까.
건강한 사람도 힘겨워하는 사분정근을 의사조차 포기한 환자가 4년 동안 거뜬히 해냈고,
기적적으로 병이 사라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 우주에 충만한 불보살님의 가피력과 내 안에 본래 깃들어 있는 불성생명이 하나되는 순간 그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요.”
기도의 법칙 속에서 소생한 스님은 당시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았던 이곳 인성암을 찾았다.
그 동안 수행생활의 절반을 범어사 대중과 함께했다면,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인적이 드문 산골암자에서 참선수행하며,
국태민안과 남북통일, 세계평화를 기원하면서 기도정진해온 것이다.
“항상 매사에 감사하고 좀더 많은 것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현상적으로는 남에게 베푸는 것 같아도 실지로는 자신이 받는 겁니다.
불자 모두가 수행하고 베풀면서 좋은 벗이 되어 자비롭게 진실하게 살아갈 때 통일을 이루고,
지상극락국토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성암(引聖庵), 성인을 끌어들이는, 성인으로 이끄는 암자라는 그 이름이 참으로 빛나는 곳이었다.
말복 중임에도 성인산의 한낮은 청량하고 싱그럽기만 한데 그 또한 도인의 덕택이리라.
글 사기순/ 월간불광 2000년 9월(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