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익스님 상좌스님 기사(목종스님)1
"내가 아는 것 널리 알리자”
은사 시봉하며 토굴 정진
‘18년 수행’ 바탕으로
해운대에 전법도량 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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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든 재가든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수행자들에게는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가 있습니다. 나는 불교TV에서 ‘신행담 가피’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이를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해운대 대광명사의 목종(木鐘)스님은 이 ‘가피’를 통해 전국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다. “출연자들이 ‘가피’에서 털어놓는 구구절절한 신행담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출가 수행자로서 미처 모르고 지냈던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불교TV의 ‘가피’는 목종스님의 진행으로 이어온 지가 3년여 130여회에 이른다. “불자의 수행은 신심이 근본입니다. 그 신심은 이성적인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전공부도 중요하지만 간절한 기도를 통한 소원성취는 이성적 표현으로는 다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심은 감성적인 면도 함께 해야 더욱 굳어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목종스님은 1987년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그때 스님 나이 27세.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대구 경북대학교 행정학과를 다니며 학업에 열중할 때였다. 학비마련을 위하여 공사판 일꾼으로 나가기도 하고 새벽 우유배달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우유배달을 하던 어느 날 택시에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튕겨나가 나뒹굴어졌다가 겨우 일어나 퍼져 앉아있으니 눈앞은 캄캄한데 머릿속은 어릴 적 기억이 필름 돌아가듯이 파르르 돌아갔단다. 4~5살 때의 기억까지 났단다.
스님은 그때 ‘아, 이런 것이 죽음이라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제껏 내가 가치를 두고 있던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고이후 학업을 계속하면서 스님은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사람이라면서 그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단다. 죽음에 앞서 사람이 해야 하는 할 일이 무엇인가, 무엇이 내가 해야 할 일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그래, 이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작심하고 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찾은 곳이 범어사요 청련암이었다고 한다. 산에 와서 살다보니 스님들의 생활이 당신이 추구하던 삶 그것이었다. 그래서 출가를 했다고 한다.
목종스님의 은사인 양익스님은 동산스님의 제자로 절집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수행자다. 또한 불무도(佛武道)의 이론체계를 금강영관(金剛靈觀)이란 이름으로 구축하고 그 분야의 제자를 많이 길러 냈다.
대광명사의 접견실에는 용성스님, 동산스님, 양익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목종스님은 용성-동산-양익스님의 대를 잇는 스님이다. 은사 시봉 8년, 토굴수행 10년의 수행력을 바탕으로 목종스님은 부산 해운대에 불음을 전하는 도량을 마련했다. ‘내가 아는 만큼이라도 알리자’는 포부로 전법도량을 개원한 것이다. 스님은 (사)대한불교조계종 부산연합회 사무총장 소임을 맡아서 부산불교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펌)
[불교신문3101호/2015년4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