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tana

적멸무심..

Kalavinka 2012. 10. 22. 23:03

 

 

 

 

적멸무심의 대장부가 걸림없는 대 자유인

 

 

 

 

정광스님

 

 

 

무심(無心)이 도(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벽스님은 전심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한 분의 무심도인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한 사람은 일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如如)한 본래의 몸이 안으로는 목석(木石)과 같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히지 아니하고 걸리지도 아니하여, 능소(能所)도 없고,

방소(方所: 일정한 방향과 처소)도 없으며, 상모(相貌)도 없고, 득실(得失)도 없다.

또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나아가 십지(十地)에 이르러 무심을 얻는 자가 있으며

이는 일념에 무심을 얻은 자와 같아서 다시 심천(深淺)이 없다.”

불조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 전했습니다.

 

지위(地位)의 점차에 관계없이 바로 무심만 사무쳐 깨달으면 그 공용(功用)이 가지런하여 다시 심천이 없다고 하셨으므로

도를 배우는 분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혹 동안상찰(同安常察)스님의 십현담(十玄談)에 나오는

“무심을 일러 도라 말하지 말라. 무심이 오히려 하나의 거듭된 관문으로 막은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분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무심은 유무의 견해가 소멸한 적멸무심(寂滅無心)으로 무심 또한 스스로 없는 무심한 본래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두 법융선사가 이르되,

“넉넉히 마음을 쓸때에 넉넉히 마음없이 쓰나니 간곡한 이야기는 명상에 수고롭고 직설은 번거롭고 거듭됨이 없는지라.

무심을 넉넉히 쓰면 항상 써도 모자라지 아니하니 지금 무심이라 말하는 곳이 유심으로 더불어 다르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일용에 무심을 여유롭게 쓰면서 생활화하면 마음이 항상 또렷하고 고요하여 편안하고 맑은 정신으로

모든 생활에 걸림없이 대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복잡한 현실 생활 중에서 직업이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생활을 할 수가 있음을

우리 불자님들은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화두선 공부를 지어갈 때는 반드시 모기가 무쇠로 된 소 등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목숨 걸고 하라는 얘기입니다.

고봉 스님은 『선요』에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지 말고 입부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번 뚫어 볼 것 같으면 몸뚱이까지 쑥 들어갈 때가 있을 것” 이라 했습니다.

 

또한 수행인은 활구(活句)를 참구해야지 사구(死句)를 참구해서는 안됩니다.

활구에서 깨달으면 불조와 더불어 스승이 될만하지만 사구(死句)에서 깨달으면 제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본래 부처님인데 “무엇 때문에 닦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은 닦음(修)이 없이 닦고, 증득(證得)함이 없이 증득하고, 무심(無心)히 닦으며, 오염(汚染)됨이 없이 닦는다고 하시며, 그 종지를 설법하실 때마다 강조했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깨달으면 무사인(無事人)이라 수행을 마쳤는데 어째서 수행을 계속한다고 합니까?’ 하시는데,

이는 미(迷)한 사람은 범부(凡夫)라 망수(妄修: 바르지 못한 수행)를 하고, 깨달은 사람은 성인(聖人)이라

진수(眞修: 진실한 수행)를 하게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사인은 곧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바르지 못한 수행은 끝마치고 진실한 수행만을 실행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긍지를 잃지 않고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사상과 행위를 늘 가지고 닦지 아니하면, 순식간에 역사의 흐름에서 밀려나게 되고,

그로인해 사람 몸마저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각자가 본래 부처님임을 명확하게 스스로 깨달아 부지런히 정진하며 수행하는 길만이

궁극의 행복한 길로 나아가는 축복 받는 삶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이 됨을 의심치 않습니다.

 

간화선은 일상생활 중에서 수행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일상생활을 떠난 간화선은 허망하여 토끼뿔이나 거북의 털 같다고 하여 지극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사문중에서는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을 늘 여의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짓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간화선이 생활선으로 이해되어 생활속에 살아 숨쉬는 실질적인 선으로 보편화 되지 못하고,

참선은 전문수행자만이 닦는 것이요, 상근기(上根機)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 잘못 인식되어 왔습니다.

간화선 대중화를 설선(說禪)하는 지금에 이르러

이곳에 모이신 사부대중이 언제, 어디서나 생활 중에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요,

급급히 변천하는 현 시대의 바쁜 생활중에도 가장 편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간화선법으로 발돋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법성게(法性偈)를 통해 이르기를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시간이요, 한량없이 오랜 시간이 곧 한 생각” 이라고 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드는 짧은 순간에 한량없는 오랜 시간을 남김없이 수용할 수 있는 수행법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여유롭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드는 순간 내가 스스로 부처님임을 믿고,

바른생각과 바른 생활이 모르는 사이 점차 익어져서 시비에 갈등하고 집착하는 중생심을 멀리 여의고

청정하고 물듬이 없는 순일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게 되므로, 조작하여 취사(取捨)함이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됩니다.

의단이 독로하면 마음과 경계가 타성일편(打成一片; 한 덩어리를 이룸)이 되고, 무심(無心)이 깊고 그윽하여

일용(日用)중에 막히거나 장애됨이 없어 불성이 밝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 과거의 악업이 문득 소멸하고 그 자취마저 찾을 길이 없게 되므로,

한량없이 오랜 시간을 곧 한 생각 속에 남김없이 거두어 들인다는 의상스님이 남긴 법성게의 유훈(遺訓)을 실지로 증험하게 됩니다.

어찌 우리들은 바쁘고 시간내기 어렵다는 핑계로 내 생명과 삶의 근원을 망각하고 성실히 돌보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간화선은 고독한 자신과의 대화의 길을 열어주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만이 지닌 인생의 고뇌에

통풍을 시켜주는 감로의 역할을 하여,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심중의 고뇌를 단번에 풀어주고,

지혜와 편안함을 원만히 갖추게 하여 구경에 이르도록 부족함이 없는 세계를 한량없이 열어보인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모인 사부대중은 간화선을 실참하여 누구나 제 자신이 부처님임을 확신하며 바르게 생각하고,

생활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간화선의 수행 요체가 되는 의단 독로(疑團 獨露)에 관해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두선은 반드시 화두를 들면서 참구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면 삿된 생각으로 믿음이 흔들리고, 간절하게 참구하지 아니하면 의단이 독로하지 아니하여,

조사관문도 뚫지 못하고 분별심도 끊을 수 없어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의심을 지어가되 지어감이 없이 지어가야 하고, 의심을 억지로 지어가지 아니하되, 끊임없이 지어가면서 짓지 아니해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자연히 성성적적하고, 성성적적한 공부가 깊이 진행되더라도 간화(看話)와 참구(參究)는 병행하여야만이

성성적적한 식심(識心)이 조복되어 의단이 독로하고, 타성일편이 되어 은산철벽을 뚫고 무문관(無門關)을 통과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일체법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간화선을 실참실오(實參實悟)하여, 일체 중생으로 더불어 청정 불국토를 장엄하실 분은

부처님도 조사스님도 큰스님들도 아니고 이곳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 자신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우리 불자님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불법의 흥망이 결정됨을 깊이 명심하시고 일상에 간화선을 열심히 닦도록 합시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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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 스님의 전심법요에 이르되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이 오직 한 마음이요, 다시 별다른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일찍이 난적도 없고, 없어진 적도 없으며 푸르지도 않고 누렇지도 않고 있고 없음에도 속하지 아니하며…(중략)…상대됨을 뛰어넘어 바로 이 몸 이대로 일 뿐이라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 버리니 마치 허공이 끝이 없어 재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정광 스님은 마음에 대한 설명으로 법문을 시작하여 한생각 일으키기 이전의 본분사에 대해 법문한 후,  한생각 일으킨 후에는 어떻게 하여야 본분사와 어긋되지 아니하고 합치될 것인지를 살펴나갔다.

정광 스님은 “간화선은 화두를 보아 각자가 지닌 본래 성품 자리인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견(徹見)하고 성불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조사선 수행법”이라며
“화두선 공부를 지어갈때는 반드시 모기가 무쇠로 된 소등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하여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말고 입부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번 뚫어 볼 것 같으면 몸뚱이까지 쑥 들어갈 때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화두 참구는 반드시 근본을 여의지 않고 공부를 지어감이 중요하므로 사람마다 원만히 갖추어진 진여자성을 깨달아 증득함에 의심을 일으켜야 하며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의 요점”이라며
“두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치심과 조사 스님들의 이심전심한 조사선과 간화선의 수행법이 근본자리에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본래성불을 주창한 것이어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말은 호칭만 다를 뿐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법문했다.
스님은 그 다음 단계로 “본래 부처님일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닦아야 하나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며 “이 물음에는  본래 부처님이기 때문에 항상 닦아야 하고 닦지 않을때는 털끝만큼도 없다고 함이 정답”이라며 이 내용을 잘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또한 “무사인 곧 깨달은 사람은 바르지 못한 수행을 끝마치고 진실한 수행만을 실행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며  “각자가 본래 부처임을 명확하게 스스로 깨달아 부지런히 정진하며 수행하는 길만이 궁극의 행복한 길로 나아가는 삶이며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이 됨을 의심치 말라”고 말했다.

 

특히 스님은 수행의 실천을 강조했다.
“어찌 바쁘고 시간 내기 어렵다는 핑계로 내 생명과 삶의 근원을 망각하고 성실히 돌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불생불멸하는 나의 진성은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들고 참구함에 있어 반드시 화두를 들면서 참구해야 하며 의심을 지어가되 지어감이 없이 지어가야 하고 의심을 억지로 지어가지 아니하되 끊임없이 지어가면서 짓지 아니해야 하는 것이 공부의 요점”이라고 법문했다.

이어 스님은 “평소 나누는 인사법인 성불합시다라는 말 대신에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입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생활하여 청정한 불국토를 이룩합시다로 대신하자”며 “우리 불자님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불법의 흥망이 결정됨을 깊이 명심하시고 일상에 간화선을 열심히 닦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스님의 법문은 미리 준비한 자료집에 따라 평소보다 30분여분이 길어진 1시간 30여 분간 계속됐으며 4시경 질의가 이어졌다.

 

질의에 나선 범어사 포교국장 무관 스님은
“화두 참구에 있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전제돼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마음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하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정광 스님은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은 솥의 세발과도 같다.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신심이 결여되면 이 사바에서 걸어가고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이 없다는 말과 같으므로 우리 모두 부처님과 다름이 없이 완벽하게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음을 믿는 신심이 도의 어머니”라고 강조했다.

“법거량으로 질문자의 견처나 수행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굳이 스님의 법력이 아니라도 일상생활 중에서 사람을 대하면서도 말로서 이것저것을 둘러대면 누구든 즉석에서 알 수 있다”며 “실지로 참구해서 공부를 지으면서 자기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딴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님은 이어 “신심을 갖춘 연후에는 뜻을 견고하게 하여 일체시비분별,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는 마음을 버리고 허공과 같아져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법문했다.

재가 질의자로 나선 최익두 부산광역시 공무원 불자회 회장은
“실상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지만 현법계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둘 아님이 아니니 그렇다면 중생을 일러 무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스님은 “깨달으면 부처고 미하면 중생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본래는 다름이 없다. 이 공부는 자기의 부질없는 망염 여의고 보이는 현재의 경계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면 행하는 바가 무위이며 마치 허공같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삼라만상 그대로가
v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과같다. 궁극적으로 부처와 중생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산은 산 물은 물이어서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다. 이처럼 천차만별로 나눠지지만 근본은 차별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본래무일불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고 질문하자 “본래의 모습을 알게 될 것 같으면 이런 의문도 없다”고 전제하고 “본래는 시작도 끝도 없고 이름과 형상을 여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아시고 저러쿵 저러쿵하는 조금의 의심도 갖지 마시길 바란다”며 대답했다.

 

-기사에서 부분 발췌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