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릉빈가

투명사회

Kalavinka 2014. 9. 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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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정보가 넘쳐흘러 모든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는 사회를 투명사회로 명명했다.  서로가 서로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이 사회는 분명 '본다'는 의미를 내재한 정보의 홍수로 대부분이 투명하게 되었다.  그럼 정보의 공개와 투명성으로 우리의 일상과 사회는 합리적이어졌는가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는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한병철은 그 이유를 벤담의 파놉티콘을 응용하여 설명한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그 안에 수용된 사람들을 각자 격리하여 하나의 거대한 감옥처럼 시스템을 운영해나가지만, 정보의 홍수가 만들어낸 파놉티콘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하나의 거대한 감옥을 스스로 만들어나간다고 설명한다.  그 안의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가 맹렬하게 교류하고 정보를 나눈다.  개개인이 표출하고 받아들이는 정보의 모습은 가히 포르노적이다.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건 사실 자유가 아니다.  자유로운 것은 단지 정보의 움직임일 뿐이다.  정보의 자유는 경로 하나하나가 거미줄이 되어 서로를 감시하며 속박하는 기제가 된다.  결국 우리는 자유롭다는 착각하에 서로를 부자연스럽게 옳아매고 있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투명사회의 특성 중 하나는 거리감의 부재와 즉흥성이다.  이 특성에 대해서는 몇가지 생각을 깊게 해 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첫째로 권력과 인민의 관계면에서이다.  권력은 정보를 소유함으로 이를 시간적으로 숙성시켜 합리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지만, 인민과 동등한 입장에서 정보를 다루다보면 정보에 대해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휘둘릴 수 밖에 없다.  숙성의 시간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권력의 나체는 그대로 드러나는데, 부패하고 신뢰감이 없는 권력일수록 허둥지둥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현실의 증거가 현재의 우리나라 정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정보의 활용에 있어 권력과 인민의 각각의 방식, 그리고 두 대상의 거리감은 국가사회의 합리적 통제라는 점에 있어 분분한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많은 면에서 수긍할 수 있는 건, 지금 우리의 정권의 민낯을 가감없이 보며 느끼는 그러한 이유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는 정보에 대한 거리감과 즉흥성이 우리에게 주는 왜곡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은 사실 합리적으로 선택되거나 통일된 답이 아니다.  오히려 억측과 음모, 잘 해야 합리적으로 보이는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정보가 쏟아졌던 천안함 사건에서, 세월호 참사에서, 그리고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했던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합리적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정보는 쏟아지지만 우리는 각자 믿고 싶은 정보만 받아들였을 뿐이고, 특정 정보는 SNS와 같은 특정 수단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그 홍수 안에서 많은 사람은 혼란만 느꼈을 뿐이다.  결국 정보의 홍수 안에서도 무감각한 사람들은 즉흥적 재미 외에는 무감각 그 자체로 머물렀으며, 믿고 싶은 정보를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여다녔을 뿐이다.  홍수는 혼란일 뿐이었다.  정보의 넘쳐남이 올바른 판단과는 거리가 먼, 혼란속의 또다른 취향적 선택을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엄청난 정보가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하며 느끼는 부자유, 구속이고, 합리적 흐름이 아닌 알 수 없는 어디론가의 몰려감일 뿐이었다.  한병철은 그 결말을 파시즘이라고 이야기한다.  과거 파시즘은 소수의 선동세력이나 선동가들이 대중을 설득하고 조직하여 만들어나갔지만, 투명사회의 파시즘은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여 하나의 파놉티콘, 즉 자율적 감시사회를 만든 다음, 알 수 없는 어디론가 집단으로 몰려가게 만든다.  어떤 규정이나 통제도 없이 자율적으로 만들어가는 파시즘은 구심점이 하나가 아닌 우리 모두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결국 긍정성의 과잉이 피로사회를 만들듯, 정보의 과잉과 자유가 만들어내는 구속의 덩어리가 굴러가는 곳은 투명하지만 투명의 이미지와는 달리 파시즘이 내재된 위험의 어떤 부정적 영역이라는 결론은 분명하되 아직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없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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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통제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에 속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독특한 점은 빅브라더와 수감자 사이의 구별이 점점 더 불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여기서는 모두가 모두를 관찰하고 감시한다. 국가의 첩보 기관만 우리를 엿보는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도 마치 첩보 기관처럼 작동한다. 이들 기업은 우리의 삶을 훤히 비추어 거기서 캐낸 정보로 수익을 올린다. 회사는 직원들을 염탐한다. 은행은 잠재적인 대출 고객들을 들여다본다. _p212~213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투명성의 폭력이 있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이용해먹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수감자들을 격리시키고 서로 대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그들은 이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_p7

 

 

투명사회/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Yves Duteil/Le Mur De La Prison D'en F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