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멈추면 에고(Ego)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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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참선을 해야 하는 이유
고요하게 멈춘다는 것은
생각의 방해 없이
의식이 깨어있다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 고요하게 멈출 때
우리는 생각 너머
에고 너머에 있는 조건에 물들지 않고
형상 없는 영원 그 자체인 참마음의
현존을 느낀다
…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
단순하게 살면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자기 내면에 그 경험의 바탕인
내적 공간을 감지하게 된다.
이 내적 공간은 가난함과 부유함
늙음과 젊음, 좋음과 나쁨 등
이원성의 어떤 속성에도
훼손되지 않는
중도(中道) 실상이다.
현대인의 생활여건은 너무 복잡하고 바쁘다. 그 때문에 고요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고 긴장과 스트레스에 싸여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인간 누구나가 원하는 자유와 평화의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부조화와 갈등 속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괴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감각기간을 통해 어떤 것을 인식하자마자 그 즉시 환영의 자아인 에고(Ego)가 분별을 하여 무엇인가와 비교하며 좋아함과 싫어함,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생각의 형태에 갇혀 버리게 되어 이원성의 세계, 망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자유가 없는 괴로운 삶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 강박적이고 무의식적인 분별을 멈추지 않는 한 적어도 그 행위를 알아차리고 그것이 일어날 때 관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깨어날 수 없다. 에고가 관찰되지 않는 마음으로 제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끊임없이 분별하는 탓이다.
참선을 하여 분별을 중단할 때마다 그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내적공간이 열리고 우리는 더 이상 에고에 점령당하지는 않는다. 참선하여 알아차림이 있게 되면 무엇을 보거나 무슨 소리를 들을 때 보고 듣는 대상에 이름표를 붙이거나 해석하기 전에, 즉 분별하기 이전에 깨어있는 틈이 있다. 그 틈을 통해 내적 공간과 만난다. 이 내적 공간이 고요이다.
참선을 통해 삶 속에서 고요를 만나게 되면 자기 내면의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차원, 생각 너머에 있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다. 고요는 생각 너머의 차원이기 때문에 생각을 통해서는 고요를 만날 수 없다. 고요를 경험하는 것은 생각(분별)을 멈추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춘다는 것은 생각의 방해 없이 의식이 깨어있다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 고요하게 멈출 때 우리는 생각 너머, 에고 너머에 있는 조건에 물들지 않고 형상 없는 영원 그 자체인 참마음의 현존을 느낀다.
이때 우리는 자유와 평화 즉 참다운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망상이 끼어들면 생각의 방해를 받아 고요가 사라지고 따라서 행복감도 사라진다. 그러나 참선을 생활화하면 생각 너머, 에고 너머에 있는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공간인 고요를 만나는 빈도가 많아지고 지속시간이 길어져 자유와 평화의 참다운 행복을 느끼는, 삶을 즐기는 능력이 커진다.
우리가 참선을 생활화하여 만약 낮 동안만이라도 불평불만, 불안걱정, 우울절망, 그 밖의 부정적인 상태에 점령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때로는 오락과 같은 정신적인 자극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허전함을 느끼지 않고 홀로 있을 수 있다면, 만약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닌 소위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아무 대가 없이 마음에서 우러난 따뜻한 마음(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때에 평소 같으면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에 점령당하고 있을 마음의 내면에 순수 공간이 열린다.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 단순하게 살면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자기 내면에 그 경험의 바탕인 내적 공간을 감지하게 된다. 이 내적 공간은 가난함과 부유함, 늙음과 젊음, 좋음과 나쁨 등 이원성의 어떤 속성에도 훼손되지 않는 중도(中道) 실상이다. 이 내적 공간, 텅빈 참마음에서 참다운 행복이 열려온다. 그것은 지혜와 자비, 무량한 공덕, 한량없는 창조위력이 펼쳐 나오는 자리이다.
참선이 생활화되면 생각의 간섭이 거의 없이, 혹은 전혀 없이 적적성성하게 대상을 지각하는 능력이 더욱 커져 점점 더 자주 자유와 평화의 참다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주위 세상이 새롭고 신선하며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때에 생명에너지는 더욱 활성화 되어 건강한 몸,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조화로운 삶을 살게 된다.
실제로는 ‘내’가 ‘삶의 본래모습’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과 분리되어서 별개로 존재한다는 착각속에서 사는 것이 우리들 중생의 현실이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자신을 ‘나’와 ‘대상으로서의 나’ 두 부분으로 분리하며, 그 분리로부터 에고가 생겨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속 이미지, 즉 개념적 자아와 함께 살아가며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나의 삶(생명)’이라고 말할 때, 삶 자체가 개념화되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
‘나의 삶(생명)’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망상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에고가 나타나서 에고가 삶의 주인노릇을 하게 된다. 깨달을 때까지 끝없이 에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에고는 만족을 모르고 더 좋은 것,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또다시 불만족의 상태가 되어 괴로움이 생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우리가 참선을 하여 에고를 알아차리고 마침내 에고 없음(본래무아)를 깨닫게 되면 이러한 괴로움의 악순환을 끊고 ‘지금 여기’의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생각에 불과한 에고의 재잘거림을 알아차릴 때마다 ‘나’는 에고의 재잘거림(생각, 감정)과 에고의 경험이 아니라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자’임을 눈치 챌 것이다. 실제로는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각성’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배경(바탕)에는 각성이 있고 전면(현상)에는 에고의 활동이 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 뿐이다. 알아차림은 ‘지금 여기’ 현재의 순간에 빛나고 있는 각성의 힘이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미래에 이뤄져야 하는 목표가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함만이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에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참선을 통해 자신안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다. 에고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마치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듯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참선을 통해 에고가 느끼고 생각하고 지각하고 경험하는 에고의 활동이 내가 아님을 알아차릴 때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참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에고는 환상이고 ‘에고는 본래 없다’는 ‘본래무아’를 깨닫게 되어 완전한 자유, 해탈열반의 삶이 실현된다.
[불교신문3095호/2015년4월8일자]
(펌)
-지환스님의 기사내용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