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춤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어느 날 아내는 의사에게서 청청벽력 같은 진단을 듣는다. 남편에게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이 사실을 숨긴 채 아들과 딸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남편과 여행을 간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을 나몰라라 하며, 손자들은 게임에 빠져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는다. 부부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느끼지만, 그 어느 밤, (위독한 남편이 아닌) 부인이 느닷없이 숨을 거둔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자식들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 보다도 홀로 남겨진 아버지 때문에 난감해 한다.
이러한 스토리는 곧 많은 사람들에게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도리스 되리 감독 자신이 밝히고 있듯 이 영화는 오즈의 영화 <동경 이야기>를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단지 오즈의 영화에서 주제와 인물 설정만을 따온 것이 아니라, 어떤 연출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오즈의 ‘냄새’를 의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자식들이 모두 바쁘단 핑계로 딸의 애인 ― 오즈 영화에서는 죽은 아들의 며느리 ― 이 대신 시내 관광을 시켜줄 때 차창 밖을 보기 위해 부부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가는 장면이라든가, 혹은 서사 전개와 딱히 상관없는 사물과 풍경을 담은 쇼트들 ― 예컨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는 고양이와 오리, 어느 집의 대문 장식 등등 ― 의 삽입 같은 형식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노골적일 만큼) 오즈인가. 이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명백해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는 오즈가 천착해 온 가족이라는 주제를 말하기 위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오즈가 속한 일본으로 나아가기 위한 포석일 것이다. 오즈는 영화 역사의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가족이라는 문제를 되풀이 그려낸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는 전통적인 가족애와 근대화의 물결에서 어찌할 수 없이 해체되어 가는 가족상을 씁쓸히 대면시킨다. 시대 변화를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부모 세대와 그들 보다 이기적이고 셈이 빠른 자식들 간의 갈등과 대비는 마찬가지로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도 기본 골격을 이룬다.
그러나 이 영화를 한낱 오즈 영화에 대한 리메이크 혹은 아류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 먼저, 도리스 되리가 비록 오즈 특유의 연출법을 부러 모방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인 스타일과 속도감은 현저히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이는 그 자체로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의 주인공들이 겪는 현대 사회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나아가 어떤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축약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과 홀로 남겨진 남편으로 끝나는 <동경 이야기>와 달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동경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목 그대로, ‘사랑[이 끝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영화는 말하려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 오즈의 영화가 일본의 전통 가족 개념이 근대에 이르러 어떻게 해체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면,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단지 가족의 해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해체된 자리로부터 가족을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아내가 살아 있었을 때 남편 루디의 일상은 그가 관청에서 맡고 있는 ‘재활용-리사이클링’ 만큼이나 반복적으로 돌고 돌아갔으며, 그는 그러한 순환에 결코 회의를 느끼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제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 앞에서 남편은 아내의 꿈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자식들의 비난처럼, 어쩌면 자신이 아내를 그동안 속박했고 그녀의 꿈을 가로막았으며 심지어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책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이루고 있던 틀에 박힌 생활과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아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일본으로 향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일본은 우리를 자못 당혹스럽게 만든다. 물론, 이미 적지 않은 서구의 영화들이 일본을 서구의 병든 몸과 마음의 치유책이자 탐미적 추구의 절정으로 그려오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경이와 동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은 어쨌거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일본은 그저 오리엔탈리즘이라든가 이국적인 것에 대한 매혹에 머물지 않는다. 도리어, 모든 면에서 그것은 ‘타자되기’ 혹은 ‘나와 너의 경계 허물기’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된다.
처음 일본이라는 이 거대한 ‘기호들의 제국’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황망해 하던 루디에게 길을 제공해 준 것은 어느 날 우연히 공원에서 만나게 된 일본 소녀 ‘유’이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와 소통하기 위해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했던 핑크색 전화기를 이용하여 매일 같이 부토 춤을 추고 있었다. 루디와 소녀는 서툰 영어로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나누고 함께 부토를 추면서 가까워진다. 그들은 국적을 떠나 ‘가족’이 되어간다. 이 때 소녀의 이름이 ‘유’ 곧 ‘너’라는 사실은 타자 되기 혹은 나/너의 경계 허물기라는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더구나 소녀는 ‘타자’의 나라인 일본 내에서도 ‘타자’인 노숙자이다.) 내가 너가 되고 너를 나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영혼은 치유되고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 되기의 모티브는 비단 동/서양의 이분법 허물기에만 머물지 않고, 남/녀의 성정체성에 관한 무수한 경계 허물기로 확장되어 영화를 촘촘히 수놓는다. 예컨대 레즈비언인 딸의 여자 애인이라든가(그/그녀는 부부를 이해하고 아끼는 마음에 있어 친자식들 보다 더 가족 같다), 완고하기 이를 데 없던 루디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의 블라우스와 스커트, 목걸이를 착용하는 장면 같은 것들(소녀에게서 부토 춤을 배우는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코트 속 여자 의상은 그를 영락없는 성도착증 환자로 보이게 만든다). 의상에 의한 성 바꿔치기는 유에게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줄곧 커다란 남성 양복 재킷을 입고 다니며, 뿐만 아니라 루디와 유가 후지산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묻는 장면에서는, 작업복과 작업모를 갖춰 쓰고 일하는, 으레 남자로 보이던 이가 실은 여린 여성임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너의 경계 허물기라는 주제를 가장 명징하게 상징하는 소재는 단연 부토라 할 수 있다. 온 얼굴을 하얗게 칠한 무용수가 무표정한 혹은 처절한 얼굴로 숨이 막힐 듯 느리게 움직이는 이 일본 현대 무용은 흔히 ‘죽음의 춤’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에서 부토는 (단지 일본의 매혹적인 ‘기호들’ 중 하나로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영화 전반부, 자식들에게 외면당하는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목전에 둔 아내 트루디의 절망은 부토 공연 관람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중반, 이야기가 전환되는 지점에서 아내 트루디는 그토록 갈망했던 부토 댄서로서의 자신과 대면하고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면 이제 남편 루디가 아내와 소통하기 위해 부토를 춘다. 루디에게 춤을 가르쳐 주는 유는 부토가 ‘그림자의 춤’이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루디에게 몸 대신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것을 권한다. 그림자는 자신이되 타인이며 타인이면서 자신인 존재이다. 그것은 곧 그와 별개의 존재였으나 하나나 다름없던 아내이기도 하다. 영화 마지막, 그토록 고대하던 후지산이 마침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루디는 아내를 위해 부토를 춘다. 이 춤은 후지산 모습이 오롯이 비춰지는 호수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느덧 그의 곁에는 죽은 아내가 그와 함께 춤을 춘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그것은 고독과 절망, 불안과 두려움이겠지만, 죽음이 결국 우리 삶의 일부임을, 또한 진정한 사랑은 타인의 그림자가 되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 후일담은 결코 허망하지만은 않음을 이 부부의 부토 춤은 말해준다.(펌)
“부토는 그림자의 춤이에요. 부토는 누구나 출 수 있어요. 누구나 그림자가 있죠. 과거의 기억과 바람을 느끼세요. 꽃을 보고 꽃을 따서 손에 들어요. 수많은 그림자가 보여요. 당신 그림자를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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