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릉빈가

생활의 기술

Kalavinka 2013. 10. 5. 00:44

 

 

 

Sun...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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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화하면 세계도 변화한다.

인간 존재의 총체적인 과정이 낳은 산물이자 그 일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데는 자기 인식이 필수적이다.

자기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올바른 사고의 토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를 알지 못하면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소망하는 자기-이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므로 가공의 비실재적인 존재이다-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알아야 한다.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일 뿐, 자신이 소망하는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기억, 소망, 좌절, 갈망, 고통, 슬픔, 덧없는 기쁨의 다발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 형체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내'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완벽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너머에는 '초월적인 나', 고차원적인 나, 시간을 초월한 영적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적인 실체도 우리가 생각해낸 것이므로 결국은 시간의 장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우리 추론의 장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서로에게서 빛을 찾지만 서로를 이해 할 수 있을만큼 온전히 수용하지는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이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그를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해 줄 사람을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현재나 미래의 어떤 권위도 자기 자신을 알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자기를 알지 못하면, 무지와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활의 기술/ 크리슈나무르티/ 박윤정 옮김/황금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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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가 1929년에 공표한 선언 <진리는 길이 없는 곳>에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어떤 조직을 통해서나 교리, 사제 또는 의식을 통해서나,

그리고 어떠한 철학적 지식이나 심리적 기술을 통해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즉, 그 진리는 관계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지니는 내용의 이해를 통해서,

그리고 지적 분석이나 내성적 해부를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찾아내야 한다.

인간은 종교적, 정치적, 개인적 안전을 위한 울타리로서 자기 안에 스스로 심상(이미지)을 구축해 놓고 있다.

 이러한 심상의 짐이 바로 인간의 사고, 그의 관계 및 그의 일상생활을 지배한다.

이러한 심상들이 우리가 갖는 문제들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들이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지각은 그의 마음속에 이미 세워진 개념들에 의해 형성된다. 그가 지니는 의식의 내용이 곧 그의 존재의 전부다.

 

 이 내용은 온 인류에게 공통으로 적용된다.

개성이란 것은 개인이 전통과 환경으로부터 획득한 이름, 형태, 그리고 피상적인 문화에 불과하다.

사람의 독특성은 피상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공통적인 의식의 내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은 개인이 아니다.

 

 벗어남(자유)은 (도전이나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이 아니며, 자유는 선택이 아니다.

사람이 선택을 갖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그의 허식이다.

자유는 방향이 없는, 상벌의 두려움이 없는, 순수한 관찰이다.

자유에는 동기가 없다.

자유는 인간의 진화 과정의 끝에 있지 않고, 그 존재의 첫걸음 속에 있다.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자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자유는 우리의 일상적 존재와 활동 안에서 선택이 없는 가운데 자각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생각(사고)은 시간이다. 생각은 시간과 과거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에서 생겨난다.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인 적이다.

우리의 행위는 지식 그리고 시간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인간은 항상 과거에 사로잡힌 노예가 된다.

생각은 늘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사고의 움직임을 깨달아 알기 시작할 때

인간은 생각의 주체와 생각, 관찰자와 관찰 대상, 경험과 경험자 사이에 분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가 망상임을 알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과거나 시간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통찰, 즉 순수한 관찰이 생겨난다.

 

 초시간적인 이러한 통찰이 마음속에서 깊은 근본적 변전을 일으킨다.

총체적 부정이 곧 (그 뒤에 드러날) 긍정적인 것의 본질이다.

사고가 심리적으로 불러일으켰던 온갖 것들이 부정되면,

그때 비로소 (긍정적인 차원을 대표하는) 사랑이 나타나는데, 사랑은 자비이며 지성이다.


 이 글은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이 직접 1980년 10월 21일 쓴 것으로 그의 가르침의 본질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고 있다. (펌)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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