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ore Line, photography by Denis Olivier. Canet-Plage, France, October 31, 2007
"시절 운세가 기울어 이제 상법 말법시대에 들어섰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요즈음 스님들은 문수보살을 친견한답시고 북쪽으로 가고, 형악을 유람한답시고 남쪽으로 간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각하는 명자비구(名字比丘)들은 부질없이 신도들의 시주만 허비할 뿐이니,
괴롭고 괴롭다.
질문했다하면 새까만 칠통 같으면서 오로지 늘 하던대로 세월을 보내는구나.
설사 두세사람은 있다해도 미친듯이 배우고 많이 듣기만 하여(狂學多聞) 이야기나 기억하고 다닌다.
가는곳마다 그럴듯한 말을 찾으면서 스님들을 인가하고 뛰어난 근기들을 대수롭게 여기면서
박복한 업을 짓는다. 뒷날 염라대왕이 못질을 할 때 '내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지 말라.
처음 발심한 후학들은 정신을 차려야지 부질없는 말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운문록-
운문선사는 부질없이 말만 기억해서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해석과 기억속에는 깨달음이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니 방법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부처를 찾고 미륵을 찾습니다. 주문을 외우며 경전의 공덕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 수행의식 속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이 선(禪)입니다.
자신의 수행의식이 과연 무상과 무아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고 속에서 끝없이 구하는 것을 보고 그 욕망의 실천 수단이
여러 경전과 법문을 배우고 듣는 것임을 자각했을때, 광학다문이 쉬게 됩니다. 학
문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학문욕구의 동기(動機)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의 동기가 사고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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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이미 소유와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결코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소유와 명예의 뿌리는 '나와 나의 것'이며 이것이 지금 이 마음 속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무문선사는 이 수행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말은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은 마음의 기미(機微)를 전하지 못한다.
말을 따르는 사람은 (진실을) 잃고,
구절에 눌러 앉은 사람은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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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할수록 자신의 문제와 멀어집니다.
사고는 아직 사고하는 자신의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는 "학문은 할수록 많아지고, 도는 할수록 줄어든다.(爲學日益 爲道日損)" 고 말했습니다.
이익과 명예를 구하는 학문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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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하고 있는 한, 자신의 사고를 볼 수 없습니다. 사고가 멈추어질때 사고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화두를 들고 있는 자신의 의식이 노출될 때, 사고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선문답은 즉흥적으로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참구를 요구합니다.
설사 어떤 수행자가 한 마디 대답 아래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미 오랫동안의 참구가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될것입니다.
무문선사는 말합니다. "조주가 답한 곳에서 바로 딱 알아낸다면, 앞에는 석가가 없고, 뒤에는 미륵이 없다."
이 말은 이처럼 조주의 경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낸 말입니다.
논리나 지식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코를 만지듯이 분명하여 사고가 필요치 않습니다.
석가와 미륵이 와도 여기서는 길을 잃습니다.
p98-103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편에서...
무문관(無門關) 강송/ 無門 혜개 선사 지음/ 김광하 강송/ 운주사

Dark Pier, photography by Denis Olivier. Les Boucholeurs, France, December 5,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