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양익 스님은 공부 잘하시고 건강하셨는데 실명 위기에 직면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스님은 밤에 법당에 가 관세음보살 정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 정진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다 한번은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눈을 고쳐주시지 않을 거라면 저를 데려가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분명 꿈은 아닌 듯한데 연꽃이 법당에 환하게 차더랍니다.
그 다음에 관세음보살님이 불덩어리를 스님 눈에다 대어 주더랍니다.
그 이후부터는 잔잔한 것까지 맑게 보이더니 시력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또한 가피 또는 이적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아픈 사람은 이적을 통해서라도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도입니다.
우리는 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탁악세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어디에 자리하든 수행을 놓지 않는 사람,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가난에 상처받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기 성찰,
자기 제도에 한 생을 바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주암 회주 정관스님의 기사에서 발췌/법보신문(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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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양익스님 생전모습. |
선종 본찰인 부산 범어사(주지 대성 스님) 원로 양익 스님이 5월 6일 좌탈한 채로 원적에 들었다. 세랍 73세, 법랍 45세.
양익 스님은 5월 6일 새벽 1시 20분 경 수행 정진해 왔던 범어사 청련암 누각에서 상좌 약연 스님, 행언 스님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고해의 바다를 건넜다.
스님의 영결식은 범어사 문도장으로 5월 10일 오전 11시 범어사에서 엄수된다.
양익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인 5월 5일 오전 약연 스님을 불러 “청련암 불사와 단양의 동산 스님 생가 복원 불사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겨 자신의 입적을 예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익 스님은 명문대학 법학과 출신으로, 무술 수련을 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1950년대 후반 범어사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문이 되었다. 이후 관법 수행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스님은 특히 법화경과 화엄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불교금강영관’이란 수행법을 창시,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
현재는 불무도란 이름으로 널리 대중화 돼 일반인들까지 이 수행법에 따라 심신을 건강하게 하고 있다.
법보신문(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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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살롱] 武術 高手(1)
불교무술(佛敎武術)의 고수(高手)였던 양익(兩翼·72) 스님이 6일 새벽 1시20분에 범어사 청련암(靑蓮庵)에서 입적하였다. 마지막 가실 때에도 그냥 가시지 않고 좌탈입망(坐脫入亡)을 통해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철리(哲理)를 몸소 보여주고 가셨다. ‘좌탈입망’은 앉은 채로 육신을 벗고 고요의 세계로 들어가는 죽음을 일컫는다. 범부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의 모습이다.
양익 스님은 종인 스님, 허주 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무술승(武術僧)에 꼽히던 인물이다. 필자는 10년 전인 1996년도 봄에 무림(武林)의 고수(?)가 범어사 청련암에 주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양익 스님을 만나러 갔던 생각이 난다. 당시 세간에 알려져 있던 양익의 무공(武功)에 대한 일화는 범어사 일주문(一柱門)을 뛰어넘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도 소림사 무술 뺨치는 고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청련암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범어사 들어가는 입구에 일주문이 있고, 이 일주문은 그 높이가 대략 4m 정도 된다. 양익 스님이 37세 때인 1971년에는 범어사 극락암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날 같이 공부하던 사형(師兄)과 사제(師弟)들이 양익 스님에게 시범을 한 번 보여 달라고 하니까, 일주문 지붕의 기왓장으로 훌쩍 뛰어올라서 한 발을 디딘 다음에 반대편 땅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던 것이다. 이 일화가 전국의 무술인들에게 널리 회자되면서 청련암은 한국의 소림사가 되었다. 수많은 고수들이 청련암의 양익 스님에게 도전장을 냈음은 물론이다. 필자가 그를 만났을 때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단아한 풍모였다. 장비 같은 모습도 아니었고, 키도 165㎝ 정도의 자그마한 체구였다. 이소룡도 170㎝가 안 되는 키였고, 미국의 태권도 대부(代父)인 이준구도 170㎝가 안 되는 작은 체구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무술의 핵심이 힘보다는 스피드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익 스님은 그날 필자에게 검도의 고수와 겨뤘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검도의 고수는 목검을 쥐고, 자신은 청련암 뒤뜰에 있던 썩은 나뭇가지를 쥐었다. 검도 고수가 목검으로 썩은 나뭇가지를 후려치는 순간에 목검이 부러져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육체적 힘보다는 내공(內功)의 축적에서 나오는 기(氣)가 중요하고, 이 기(氣)는 마음의 집중에서 온다는 것이었다. 조용헌 |
[조용헌살롱] 좌탈입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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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禪家)에서 좌탈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다음 환생(還生)과 관련된다고 보는 사생관(死生觀) 때문이다.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覺醒)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상태가 다음에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나 육체적 조건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공포와 혼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가 이월되어서 환생할 때에도 비각성(非覺醒) 상태로 태어나지만,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는 죽음은 다시 환생할 때 각성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탈입망은 요즘 이야기 되는 ‘웰 엔딩(Well Ending)’의 최고 수준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양익 스님은 죽기 이틀 전에도 강원도 홍천에서 진행되던 시방원(十方院) 불사(佛事) 현장에 다녀왔다고 한다. 내려오다가 법흥사에 들러 초파일 등(燈)을 달았다. 범어사에 와서는 제자들에게 나머지 불사를 당부하였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서류와 자료도 모두 넘겨주었다. 물론 이때까지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오후에 다시 통도사 보궁(寶宮)에 가서 등을 달고, 저녁에 범어사 청련암에 돌아왔다. 저녁에는 당신 거처에서 평소와 같이 조용히 참선을 하고 있었다. 상좌가 스님 방에 들어가서 초파일 뒤처리에 대한 질문을 했으나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대신 “흠-흠-흠” 하고 큰 기침 3번을 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니르바나(Nirvana·열반)에 들었다.
[조용헌 살롱] 武術高手(3)
얼마 전 입적한 양익(兩翼) 스님이 무술에 입문하게 된 시기는 10대 중반이다. 처음에는 놋쇠 젓가락을 과녁에 던지는 연습을 하면서 집중력을 키웠다. 3m 앞에서 던지다가 5m 앞에서 던지고, 나중에는 20m 거리에서 적중시키는 훈련을 하였다. 집중력이 강화되면서 경공술(輕功術)과 공중돌려차기 등의 기술을 익히게 된다.
그는 출가하기 전인 20대 중반 무렵에 강원도 시골 동네를 지나다가 동네 사람들 100여 명이 30여 명 정도의 건달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화가 난 양익은 혼자서 이 30여 명의 건달을 모조리 제압하였다. 건달들이 양익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양익 스님의 알려진 제자는 경주 골굴사의 적운, 서울 호압사의 원욱, 불무도(佛武道)를 보급하는 안도, 보령 백운사의 법찬, 김해 모은암의 정산 스님 등이 있다. 골굴사의 적운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도 태권도 4단의 고단자(高段者)였다. 현재 골굴사는 선무도(禪武道)의 중심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호압사의 원욱 스님은 점프력이 좋다. 2.5m 정도의 높이에 걸려 있는 샌드백을 거꾸로 공중제비를 돌면서 발로 차고 내려올 정도이다. 불무도의 안도 스님은 봉(棒), 도검(刀劍), 발차기에 모두 능하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네댓 번의 발차기를 연속적으로 할 수 있다. 정산 스님은 승가대학에 재학하던 시기인 1986년에 ‘10·27 법난(法難)’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적이 있다. 이때 전경 1000명이 봉은사를 둘러싸고 완전포위한 상태였는데, 정산은 경공술을 발휘하여 유일하게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양익 스님이 주석하던 범어사 청련암 무술의 본격적인 수련법은 관법(觀法)이다. 호흡을 통해서 축적된 기운이 몸 안의 7군데 차크라[七輪]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방법이 바로 관법이다. 앉아서 하는 좌관(坐觀), 서서 하는 입관(立觀), 움직이면서 하는 행관(行觀)으로 나눠진다. 입관 중의 하나인 영동입관(靈動立觀)은 호랑이, 용, 사슴, 원숭이, 곰, 거북, 학의 자세를 취하면서 하는 관법이다. 이런 자세를 취하면서 호흡을 바라보면 몸 안의 기맥(氣脈)이 모두 뚫리면서 번뇌가 사라진다. 몸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 방법이 바로 무술고수의 수련법이었다.
조용헌 /조선일보(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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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식 기사내용/만불신문(펌) (0) | 2012.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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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0) | 2012.07.04 |
다비식(펌) (0) | 2012.07.04 |
訃 告 보도내용 (0) | 2012.07.04 |
靑昊堂 兩翼大禪師 (0) | 2012.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