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가만히 숨어 있어라.
물같이 흘러가는 호흡의 흐름을 조용히 주시하면서
꽃잎처럼 떠가는 감정의 부침을 바라보라.
사라져 가고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들이
끊임없이 마음의 강을 따라 흐를 때
느낌을 단서로 호흡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로인해 마음이 고요해질 때
그 속에 한결같이 드러나는
모든 존재는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시간의 흐름 속에
욕심이 가라앉고 맑은 기쁨이 떠오를 때 그를 즐겨라.
여유로운 미소로...
-도현 스님-
간화선에도 이상과 현실이 같이 있지만 이상이 조금 두드러지고,
위빠사나는 현실 직시적인 점이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궁극은 하나인데 접근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요.
그러니까 <전유경>의 비유처럼 간화선은 화살에 대한 출처를 분명히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따지다가는 죽으니까 화살부터 빼고 현실적인 문제부터 살피라는 게 위빠사나인 거에요.
우리가 위빠사나를 하건 간화선을 하건 깨쳐도 '알 수 없음'은 똑같아요.
<선가귀감>에, '석사모니 부처님도 그 자리를 몰랐는데 어찌 가섭이 전할까'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모르는 그 자리만 가지고 있다가는 인생살이 망쳐요.
모르는 그 자리는 그대로 두고 간화선은 중생이 본래부처임을 확신하고 현실 생활에서 부처의 행을 바로 쓰는
활불사상(깨침을 동시에 쓰는 행위) 돈오돈수를 말하니까 좀 이상적이고 깨침(正見)을 중시할 필요가 있고,
위빠사나는 본래부처도 아니고 본래중생도 아니니 하나하나 차근차근 부처답게 살자는 것이라
깨어있음(正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점진적으로 인격자답게 사는 돈오점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부처님답게 인격자답게 살자는 것 아닙니까...
p146-147
사정근은 좋은생각이 나면 지속되게 하고 나쁜 생각이 나면 끊는 것인데 이것은 실제 수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동차 네바퀴가 사념처라고 생각하면 사띠는 운전하는 사람이고 팔정도는 차가 달리는 도로라고 생각하세요.
공부하다가 안 좋은 것은 오장애예요. 운전하다보면 좋은 경치가 한번씩 지나가잖아요. 그것이 칠각지입니다.
우리가 운전하면서 액셀러레이터만 밟게 되나요? 어두우면 전조등도 밝혀야 하고,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도 보면서 운전하잖아요.
사정근, 오근, 오력은 그런 것들입니다. 사념처와 팔정도 사이에 있는 부수적인 것들로 그때 그때 상황따라 쓰는 것입니다.....
그냥 들숨 날숨 하면 거기서 다 되는 거예요..
p121-122
번쩍번쩍하는 샹들리에가 투명하거든요. 거기 하나하나마다 구슬이 많이 달려 있어요.
그 구슬의 빛이 교차하면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것은 그 구슬 자체가 투명하기 때문입니다.
구슬이 불투명하면 그렇게 빛이 좋지 않을 거예요. 그 하나하나의 구슬이 개개의 우리잖아요(箇箇圓成).
세상이 소통이 잘 되고 상즉상입하려면 구슬 자체가 투명해야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그 개인이라는 구슬을 투명하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야 한 가정에서부터 개인, 나라, 사회, 국가가 다 제대로 소통이 됩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화엄세계, 이상세계는 곧 샹들리에의 불빛이 서로 소통되듯이 아름다운 세계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고쳐야 합니다. 부처님의 원리는 나부터 고치는 것이거든요.
나도 나를 고치기가 힘드는데 남을 고칠 수 있나요. 그러니까 나부터 고치는 거예요.
이게 수행이에요.
p145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도현스님/ 웅진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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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참에서 보시를 받아 돌려가면서 보게 된 책에서 나름 눈에 들어오는 글을 뽑아보았다.
위빠사나 지침서를 이론대로 옮겨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고, 단지 선방을 전전하던 납자의 위빠사나 수행경험담을 옮겨 놓은 책에서는,
호흡에 집중하는 수식관과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 지금의 내 수행에 보탬이 되게할까...
나름 화두를 잡고 좌복에 앉으면서, 고민하던 가려운 부분을 조금 시원하게 긁어준 느낌의 글만 추리게 된다.
대승, 소승을 떠나 일상의 수행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 나가는 방법으로 조금 수월하게 선택할 방법들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시행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것이라 여긴다.
살아 있다면 절로 , 저절로 숨은 쉬는 것이니까, 이보다 쉬운 대상이 또 있을까?
한번 들이쉰 숨이 돌아나오지 못하면 그대로 이 생을 마감하는 것 아닌가..
숨이 들어가 나오는 그 꼭지점에서, 망상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화두를 드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그것도 않되면..
일타스님 말씀처럼 의심들리지 않는 화두라도 소리내어 잡아보는 것은 또 어떨지?
"내 쉬는 숨에만 집중해서 숨을 내뱉으면 저절로 숨은 들어오지?"
오래 전 큰스님께서 툭~던져주신 그 가르침. 누군가는 삼토식이라고 하던가?
교본이 법당 뒤 그림으로 남아 있으니 참고로 해도 될 것 같다.
'안반수의'...절의 들어가는 초입에 세워진 돌비석에 새겨진 눈에 익은 큰스님의 필체.
이렇게 가깝게 길을 보여주셨는데 내 눈이 어두운 탓이지..흐미~~
*사띠; 알아차림
삼빠챤냐; 살핌
알아차림은 하나의 주제를 갖는 것이고, 살핌은 주변을 살피는 것...
일어나는 그대로, 그저 그런줄 알고 알아차림 할 것.
그대로 지켜 볼 것.
생각에 이름 붙이기..
대상에 집중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할 것.
호흡으로 돌아가기..
*Cris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