狐疑가 淨盡하면 正信이 調直이라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면
자기의 일체 변견과 망견을 다 버리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 화살같이 곧게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正信)이란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의 전체를 통한 데서 나오는 믿음이며,
처음 발심하는 신심(信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경을 성취하면 바른 믿음이라 하든 정각(正覺)이라 하든 여기서는 뭐라 해도 상관 없으니, 이것이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수행의 지위가 낮고 정각은 수행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근본을 바로 성취한 사람을 믿음이라,
각(覺)이라,부처라, 중생이라, 조사라, 무어라 해고 상관 없읍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바로 성취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름은 무엇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一切不留하야 無可記檍이로다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객관적으로 일체가 머물지 못한다거나 주관적으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머물 것이 있고 머물지 못할 것이 있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는 능(能) 소(所)가 붙으므로 바른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는 바른 믿음이 곧고 발라서 진여자성이 현전해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못하고 또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었을 기억할래야 할 것이 없읍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찾아 볼 수 없는데 무슨 기억을 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명(明)이란 일체를 비추어 다 살아나는 것으로서, 즉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허(虛)가 명(明)을 비추고 명(明)이 허(虛)를 비춰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遮照同時)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자성의 묘한 작용이므로 마음의 힘으로써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非思量處라 識情으론 難測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대도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깨쳐야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의 사량은 거친 사량(추思量)이라 하고, 성인의 사량은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사량(微細思量)이라 하는데
거친 사량은 그만 두고, 미세사량으로도 대도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성인도 허허로이 밝게 스스로 비추는 무상대도는 알 수 없고,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妙覺)만이 그러한 무상대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냐 하면 바로 진여법계라 한다는 것입니다.
眞如法界엔 無他無自라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여기서부터는 [신심명(信心銘)]의 총결산입니다.
모든 병폐를 털어버리면 진여법계가 현전한다는 것입니다.
진여법계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 진여법계의 내용은 남도 없고 나도 없어서 모든 상대, 곧 일체를 초월하여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이란 상대로 되어 있는데, 그 현상계를 해탈하여 진여법계 일심법계인 자성을 보게 되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절대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상대법이 끊어진 쌍차(雙遮)의 경계이며 진여법계 일심법계인 것입니다.
要急相應하면 唯言不二로다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앞에서 '진여법계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고 하니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그런 세계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진여법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대자유의 세계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3차원의 차별세계를 완전히 초월하면 차별이 다한 4차원의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여법계이며 '둘 아님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 아니란 말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있음(有)과 없음(無)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립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는 상대세계를 초월하고 절대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상대를 극복하여 융합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남이 없다 하니 아무 것도 없이 텅텅 빈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나와 남이 없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남으로서,
나와 남이 하나로 통하는 절대법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不二가 皆同하야 無不包容하니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서로 상극되는 물과 불을 예로 들어 봅시다. 물과 불이 상대적으로 있을 때는 서로 통하지 않지만,
참으로 쌍차(雙遮)하여 물과 불을 초월하면 물이 곧 불이고 불이 바로 물이 되어 버립니다.
보통의 논리로는 전혀 말이 안되는 듯도 하지만, 여기에 와서는 물과 불이 둘 아닌 가운데 물 속에서 불을 보고 불 속에서 물을 퍼내게 되니, 이러한 세계가 참으로 진여법계라는 의미입니다.
둘이 아닌 세계, 즉 물도 불도 아닌 세계는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체 만물이 원용무애하고 탕탕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한 것이니 쌍조(雙照)입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일체 만물의 대립은 다 없어지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깨치지 못하면 서로서로 대립이 되어 포섭이 되지 않고 싸움만 하게 됩니다.
쌍차(雙遮)란 모든 것을 버리는 세계면, 쌍조(雙照)란 모든 것을 용합하는 세계입니다.
十方智者가 皆入此宗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 옴이라
시방세계의 모든 지혜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종취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있음과 없음의 차별세계를 떠나면 절대세계인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종취에 들어 간다'한 것은 바로 '둘 아닌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대립을 버리면 모든 것이 융합한 세계에 들어가는데 그곳이 곧 둘 아닌 세계, 진여의 세계, 쌍조의 세계인 것입니다.
宗非促延이니 一念萬年이요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이러한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촉(促)이란 짧은 것, 연(延)이란 긴 것입니다.
이 진여법계의 종취는 시간적으로 짧거나 길지도 않다는 것으로서 한 생각 이대로가 만년이며 만년 이대로가 한 생각입니다.
즉 무량원겁(無量遠劫)이 한 생각이며 한 생각이 무량원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짧은 것도 없고 긴 것도 없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긴 것이 짧은 것이고 짧은 것이 긴 것이라는 뜻으로서, 한 생각이 만년이며 만년이 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짧고 긴 것이 아니라'함은 쌍차(雙遮)이며, '한 생각이 만년 이라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여자성을 깨쳐서 대도를 성취하면 시간의 길고 짧음이 다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만년'이라고 해서 한 생각과 만년이 따로 있는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이 끊어진데서 하는 말이므로 '한 생각'도 찾아불 수 없고 '만년'도 찾아불 수 없읍니다.
無在不在하야 十方目前이로다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 앞이로다.
시방(十方)은 먼 곳을 말하고 목전(目前)은 가까운 곳을 말합니다.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탈하여 둘 아닌 진여세계로 들어가면 시간적으로 길고 짧음이,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한 생각이 만년이고 만년이 한 생각이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고 목전이 시방입니다.
여기서는 멀고 가까움이 통하여 원융무애한 둘 아닌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는 것은 쌍차를 말하며, '시방이 눈 앞이라'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신심명.증도가 강설/ 성철스님 법어집 1집 5권/장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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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 속에 묻혀 잊혀지는 것 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 Astor Piazzolla, 1921~1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