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心銘 8

Ratana 2012. 8. 27. 23:08

 

 

Self Kiss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잘잘못과 옳고 그름 모두가 변견이니, 이러한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중도가 현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眼若不睡면 諸夢自除요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은 없는 것입니다.

꿈은 누구든지 잠을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心若不異면 萬法一如니라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으니라.

 

만법이 본래 한결 같아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한데도 그것을 보지 못함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전혀 분별심이 없으면 '만법이 한결같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모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萬法이 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照) 없애 버림으로써 (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

고요하면 항상 비치는 (寂而常照) 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토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읍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읍니다.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읍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究竟窮極하야 不存軌則이요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거기서는 중도라 할것도 찾아불 수 없읍니다.

이것이 구경하고 궁극한 법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법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 해서 단멸(斷滅)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契心平等하야 昭作이 俱息이로다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내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 망견을 찾아불 수 없고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이 산 위로 솟아 올라도는 것이 아니라,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은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함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쉰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바로 일체 변견을 다 쉬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심명.증도가 강설/ 성철스님 법어집 1집 5권/장경각

 

 

 

 

 

 

 

 

 

 

Shadows Dan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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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lavi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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