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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PRINTS, SHADOW & THE MAN
이 우주 속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반영이다
이 방편은 매우 심오하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실로 말하자면 속박과 자유는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반대가 아니다, 그것들은 상대적이다,
무엇이 자유인가? 그대는 ‘속박이 없는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속박은 무엇인가? ‘자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그것들을 정의할 때 서로를 이용한다,
그것은 찬 것과 더운 것의 관계이다, 반대가 아니다,
찬 것은 무엇이며 더운 것은 무엇인가?
같은 현상의 온도가 다른 상태이다,
그것들은 서로 상대적이다,
찬물이 들어 있는 물통이 있으면 다른 물통은 더운물이 들어 있다,
그대는 그 둘 다에 손을 집어 넣는다,
그때 그대는 무엇을 느끼는가? 온도 차이를 느낄 것이다.
처음에 그대가 얼음물에 손을 넣었다가 그 다음에 더운물과 찬물에
손을 넣는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그대는 찬물이 좀 덜 따뜻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대의 손이 찬물보다 훨씬 더 차가워졌다면 찬물이라도 더운 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상대적이다, 찬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차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단지 온도 차이만 있을 뿐 같은 현상이다.
탄트라는 말한다,
속박과 자유가, 삼사라와 모크샤가 둘이 아니며 같은 것의 상대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독특하다,
탄트라는 그대가 속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모크샤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대가 그 둘 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는 없다.
그러니 첫 번째 것을 이해하라, 그것은 어떤 것에도 반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대하게 되면 그것에 속해 있는 다른 것으로 이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섹스에서 브라흐마차리야로 이동하지 마라, 만약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대의 브라흐마차리야는 그저 성적인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탐욕에서 무욕으로 가지 마라, 무욕은 미묘한 탐욕이다,
그대가 믿는 종교가 탐욕적으로 가지 말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성자로 알려진 사람과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탐욕을 떠난다면 너희는 피안의 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받으리라, 더 큰 상을 얻게 되리라!"
탐욕적인 사람들, 저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설교에 자극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 많은 것을 버릴 준비를 한다,
세상에 가서 많이 얻으려고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소유욕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탐욕적인 사람이 갑자기 욕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의 욕심을 깊이 만족시켜 주는 어떤 동기가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상대극을 만들지 마라.
반대극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같은 현상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때는 양극이 모두 같다,
만약 이 느낌이 깊어진다면 그대는 양쪽 모두를 초월하게 된다,
그때 그대는 삼사라도 아니고 모크샤도 아니다.
진짜로 그대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게 된다,
구하는 마음이 멈추게 된다, 그 멈춤 속에서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모든 것이 같다는 그 느낌 속에서 미래는 저절로 떨어져나가 버린다.
이제 그대는 어디에 설 수 있겠는가?
섹스와 브라흐마차리야가 둘 다 똑같다,
그러면 어디로 가겠는가?
탐욕과 무욕이, 폭력과 비폭력이 같은 것이면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그대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움직임은 멈춘다, 미래가 없다, 그대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모든 바람들이 똑같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대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종종 사람들이 나에게 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바람은 있는 그대로의 그들 속에 이미 있다,
만약 그들에게 욕심이 많다면 그들은 무욕을 바란다,
그들이 성욕이 강하다면, 성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들은 브라흐마챠리아를 원한다,
어떻게 하면 섹스를 초월할 수 있을지 묻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섹스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챠리아가 되고 싶은 이 바람은 이미 그들의 성욕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들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과하다, 그들은 부담을 느낀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대가 집착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짐지울 수 없다,
부담감은 짐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머리 때문이다.
그대는 스스로 그것을 지고 간다, 그리고 그대는 전세계를 다 짊어지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런 불행한 경험속에서 반대 상황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대는 반대편을 향해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돈을 향해 달려왔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명상을 향해 달려간다,
전에 그들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좇아 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저 세상의 어떤 것을 좇고 있다.
그러나 쫓아가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쫓아 다님이 문제다,
대상은 관계가 없다,
바람 그 자체가 문제다,
무엇을 바라는지는 의미가 없다,
그대가 바라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대는 대상을 계속 바꿀 뿐이다.
오늘 그대는 A를 바란다, 그리고 내일은 B를 바란다,
그대는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모레는 C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변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변형 되지 않았다.
그대는 A를 바라고, B를 바라고, C를 바랬다, A, B, C는 그대가 아니다,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그대다, 그대는 변화하지 않고 여전하다,
그대는 속박을 원했다, 그래서 그대는 좌절했고 그 좌절에 진저리가 났다,
그때 그대는 자유를 원한다, 그대는 자유에 대한 바람을 갖게 되고
그 바람은 새로운 속박이 된다. 따라서 그대는 자유를 바랄 수 없다,
바람은 속박이다, 그래서 그대는 해탈을 바랄 수 없다
바람이 멈출 때 진짜 자유가 거기 있다,
그래서 이 방편은 말한다.
"진실로 말하자면 속박과 자유가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속박이나 자유라는 말은 우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한 말이다,
“... 이 우주는 마음의 반영이다...”
그대가 이 우주 속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반영이다,
만약 그것이 속박처럼 보이면 그것은 그대 마음의 반영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유처럼 보인다면 그것 역시 그대 마음의 반영이다.
“그대가 하나의 태양으로부터 물 속에 비친 수많은 태양들을 보듯이
얽매임과 해탈을 그렇게 보라.“
태양이 떠오른다, 그 아래는 수많은 연못들이 있다,
어떤 것은 더럽고 어떤 것은 깨끗하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
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추하다,
하지만 하나의 태양은 많은 연못에 반사된다.
우리는 그 반영들을 헤아리면서 태양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반영이 아니라 실체를 들여다보는 자는 그것이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보는 세상 역시 그대를 반영한다,
만약 그대가 성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세상은 성적으로 보일 것이다,
만약 그대가 도둑이라면 모든 사람이 도둑처럼 보일 것이다. (펌)
Footprints in the S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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