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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아렌트는, 엔지니어든 누구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일터의 주인장이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즉 정치가 더 높은 위치에서 물리적 노동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녀가 이러한 확신에 도달한 것은 1945년 로스알라모스Los Alamos 프로젝트의 결과로 최초의 핵폭탄이 만들어졌을 때였다. 미사일위기 당시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미국인들은 심각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뉴욕의 거리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지만, 아렌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덤덤했다. 그녀는 내가 이 사건을 제대로 보고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 그 교훈이란,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를 파멸시킬 물건을 발명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우려는 구미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신화의 판도라Pandora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도라는 “명령을 어긴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하려고 제우스가 지상에 내려 보낸” 발명의 여신이었다. 헤시오도스Hesiodos는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에서 판도라를 “모든 신들이 모여 만들어낸 고약한 선물”로 묘사했다. 판도라가 전에 없던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그녀의 상자(이야기에 따라서는 단지라고도 나온다)를 열자, “고통과 악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퍼졌다”고 헤시오도스는 전한다. 그리스 문화가 자기 모습을 갖춰감에 따라 판도라가 인간 내면의 한 속성이라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점점 분명해졌다. 즉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구축된 문화는 항상 화를 자초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인간 내면의 순진한 무엇이 이런 위험을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순전히 의혹과 흥분, 호기심에 홀려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위가 아무 탈이 없는 행위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로스알라모스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가 적었던 업무일지는 아렌트가 최초의 대량살상 무기를 보면서 인용할 만한 내용이었다. 오펜하이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술회했다. “무언가 매력적인 기술이 눈에 뜨이면, 우리는 일단 달려들어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그 기술이 성공한 뒤에 가서야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따져본다. 원자폭탄은 바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이 그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도 호기심에 잠재된 위험이 묘사돼있다. 여기서 오펜하이머 역할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브이고, 밀턴이 묘사한 이 태초의 기독교적 광경에서 인간은 성애(性愛)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된다. 현대로 넘어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봤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저술에도 판도라는 강력한 이미지로 살아 있다.
고대 세계의 신화에서 판도라 상자 속의 공포는 인간의 잘못으로 생긴 게 아니라, 신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속의 역사로 넘어온 판도라의 공포는 더욱더 종잡을 수가 없다. 원자폭탄 개발자들은 호기심에 죄의식을 보태게 됐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호기심에서 비롯된 결과를 변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펜하이머와 I. I. 라비Rabi,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를 비롯해 로스알라모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원자폭탄을 만든 일로 죄의식에 휩싸였다. 오펜하이머의 일기에는 인도의 신 크리슈나Krishna의 말이 적혀 있다. “나는 세상을 파괴하는 죽음의 화신으로 변했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두려워하는 이 고약한 역설은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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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가 판도라를 다룰 때 부딪쳤던 난관은 그녀가 아니말 라보란스와 호모 파베르를 구분했던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이 두 가지는 일하는 인간의 이미지다. 그녀는 이 두 가지를 쾌락과 놀이, 문화가 배제된 인간의 조건으로 보았던 만큼 인간에게는 가혹한 개념이었다.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는 굴레를 짊어진 짐승처럼 매일 고된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 즉 ‘일하는 동물’이다. 아렌트는 세상과 차단된 채 일에 몰입해 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일하는 동물’의 이미지를 더 확장했다. 원자폭탄을 “매력적”인 문제로 느꼈던 오펜하이머의 상태나, 아주 효율적인 가스실을 만들려고 절치부심했던 아이히만의 상태는 다름 아닌 일하는 동물인 것이다. 그 일이 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다. 아니말 라보란스에게는 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아렌트가 말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다른 종류의 일, 즉 공동의 삶을 만드는 인간의 이미지다. 여기서도 그녀는 예로부터 이어져온 이 관념을 더욱 확장했다. 라틴어 호모 파베르는 “제작자man as maker”를 뜻하는 단순한 말이다. 이 표현은 르네상스 시기 철학과 예술에 갑자기 등장한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아렌트보다 두 세대 전에 이 용어를 심리학에 적용했는데, 그녀는 특수한 방식으로 정치철학에 적용했다. 호모 파베르는 물질적인 노동과 행위를 판단하는 존재다. 아니말 라보란스의 동료가 아니라, 그 위에 선 상위자다. 즉 그녀는 우리 인간이 두 가지 차원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우리가 물건을 만들며 사는 차원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는 그저 일에 함몰된 채로 도덕이나 윤리를 모른다. 동시에 우리는 이보다 높은 다른 차원에서도 살고 있다. 이 차원에서 우리는 만드는 일을 멈추고, 서로 어울려 토론과 판단을 시도한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어떻게?”라는 질문밖에 하지 않는다. 호모 파베르는 “왜?”를 묻는다.
이러한 구분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보인다. 아니말 라보란스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각할 줄 아는 존재다. 현장의 작업자들이 토론하는 화제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작업 대상인 물건이라고 해도, 분명히 그들은 작업 중인 일을 화제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어디까지나 노동이 완료된 뒤에야 인간의 의식이 등장한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다. 즉 일할 때는 일만 할 뿐이고 일이 끝나고 나야 제대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하는 동안에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그 과정 속에 갇혀 있다고 보는 게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일 것이다.
구체적인 물건을 만드는 과정이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주는가? 우리가 물건을 다루며 배우는 행위는 직물의 질을 판별하거나 물고기를 제대로 잡는 방법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질 좋은 천이나 잘 만든 요리에서 우리는 좋고 훌륭하다는 것, 즉 “선(善)good”의 폭넓은 범주들을 탐색할 수 있다. 즐거움을 주는 좋은 점들이 그런 물건들의 어느 구석에서 발견되며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만든 것인지, 물건에 담긴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것이다. 문화적 물질주의자들은 물건 그 자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그 물건들이 어떻게 종교적 · 사회적 · 정치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물건을 만드는 아니말 라보란스가 호모 파베르를 안내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노년의 아렌트 선생은 호모 파베르의 판단력이 인류가 자초할 화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그의 제자인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일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희망을 거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판도라 상자 속의 공포는 줄일 수 있으며, 물질적 삶을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더 잘 알게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펌)
-책 "Prologue: Mas as His Own Maker",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장인The Craftsman》, 2008 에서 일부 발췌-
*Svetlana Korolyova 작품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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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l laborans? Homo fa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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